
아내는 종종 제 책상을 보고 말합니다.
책상 정리부터 좀 하라고.
억울한 점도 있습니다. 저는 정리를 싫어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거실이나 화장실처럼 가족이 함께 쓰는 공간은 가능하면 정돈된 상태로 두려고 합니다.
거실 테이블 위에 물건이 쌓이거나, 세면대 주변이 흐트러져 있으면 저도 신경이 쓰입니다.
가족이 함께 쓰는 공간은 나의 공간이 아니라 우리의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서재나 회사의 제 자리는 다릅니다.
특히 책상은 잘 정리되지 않습니다. 한 번씩 크게 치우기도 합니다.
문제는 그 상태가 오래가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치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펜이 올라오고, 케이블이 나오고, 메모지가 생기고, 영수증이 들어오고, 읽다 만 책과 노트가 겹칩니다.
어느 순간 보면 다시 익숙한 혼돈이 돌아와 있습니다.
왜 이럴까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다.
보통 정리를 잘하는 사람이면 어디든 잘하고, 못하는 사람이면 어디든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공간에 따라 다릅니다.
가족이 함께 쓰는 공간은 정리하려고 하고, 개인적인 생각이 흐르는 공간은 쉽게 어질러집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단순히 정리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공간마다 제가 기대하는 질서가 다른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오늘은 정리된 거실과 제 어지러운 책상 사이의 괴리에 대해 생각을 해봤습니다.
참 한가하다는 뜻입니다.
완벽주의자의 역설
저의 첫 번째 가설은 완벽주의자의 역설입니다.
저는 시작하면 적당히 끝내는 법을 잘 모릅니다.
청소를 하기로 마음먹으면 눈에 보이는 것만 대충 치우고 끝내기가 어렵습니다.
한번 시작했으면 완전히 까뒤집어서 다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책상 위 물건을 치우다 보면 서랍을 열게 되고, 서랍을 열면 예전에 넣어둔 물건들이 나오고, 그걸 보다가 버릴지 말지 판단해야 하고, 결국 작은 정리가 대청소가 됩니다.
문제는 책상입니다. 책상은 아무리 뒤집어 정리해도 곧 다시 어지러워집니다.
일하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즉, 전시장이 아니라 작업대입니다.
무언가를 쓰고, 읽고, 찾고, 연결하고, 충전하고, 잠시 내려놓는 일이 계속 일어납니다.
그러니 책상 정리는 끝이 있는 일이 아니라, 계속 반복되는 일에 가깝습니다.
완벽주의자에게 반복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한 번 잘해두면 그 성과가 유지되는 일은 견딜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잘해도 곧 무너지는 일은 시작하기가 싫어집니다.
어차피 다시 어지러워질 것이라는 예감이 정리의 의지를 약하게 만듭니다.
그러다 보면 제법 그럴듯한 결론에 도달합니다.
책상은 원래 어느 정도 어지러운 게 맞는 것 아닐까.
즉, 책상은 정돈을 완성해두는 장소가 아니라, 잠시 해체된 채 다른 질서를 기다리는 표면에 가까운 게 아닐까.
물론 이 말은 위험합니다. 게으름은 대개 이런 식으로 철학의 옷을 입고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닌 것 같습니다. 책상 위의 어지러움에는 가끔 나름의 질서가 있습니다.
남이 보기에는 물건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것 같지만, 저는 대체로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압니다.
자주 쓰는 펜은 손이 닿는 곳에, 충전 케이블은 몸을 조금만 기울이면 잡히는 곳에, 메모지는 시선이 자주 닿는 위치에 있습니다.
모드의 간극
두 번째 가설은 생활 모드와 업무 모드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생활 공간에서 저는 정돈을 원합니다. 가족이 오가는 공간에서는 물건이 자기 자리에 있어야 마음이 편합니다.
공동 공간의 질서는 함께 사는 사람에 대한 예의에 가깝습니다.
내가 편하다고 아무 데나 물건을 두면, 그 물건은 다른 사람의 불편이 됩니다.
하지만 업무 공간에서는 보기 좋은 질서보다 손이 기억하는 질서가 먼저 옵니다.
책상은 눈을 위한 공간이기 전에 손을 위한 인터페이스입니다.
펜은 예쁜 펜꽂이에 꽂혀 있을 때보다, 지금 당장 손이 가는 자리에 있을 때 더 유용합니다.
너무 잘 정리하면 오히려 찾기 어려워집니다.
어디에 넣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잘 정리했다는 기억만 남습니다. 그 정리했다는 말은 대체로 물건의 실종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저는 책상 위에 남겨둡니다.
이건 곧 다시 볼 자료니까. 이 펜은 지금 쓰는 펜이니까. 이 케이블은 빼면 다시 찾기 귀찮으니까. 이 메모는 버리면 생각까지 같이 버리는 것 같으니까. 물건들은 저마다 작은 이유를 가지고 책상 위에 남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이유에 비교적 관대합니다.
수납의 실패
세 번째 가설은 수납의 실패입니다.
책상 위에 물건이 많은 이유는 수납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서랍장을 사면 해결될 줄 알았습니다.
물건을 넣을 곳이 생기면 책상은 비워질 것이고, 책상이 비워지면 일도 더 차분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서랍장은 기적을 만들지 못했습니다.
아니, 다른 종류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서랍 안으로 물건을 정리해 넣었더니, 책상 위에는 새로운 물건들이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물건이 어딘가에서 복제되는 것처럼요. 케이블을 넣으면 또 다른 케이블이 나오고, 펜을 치우면 다른 펜이 나오고, 노트를 넣으면 다른 문서가 나타납니다.
서랍장은 책상을 비워주는 장치라기보다, 책상 위 물건에게 다음 세대를 허락하는 장치였는지도 모릅니다.
문제는 수납 공간의 부족만은 아니었습니다. 책상 위에 물건이 올라오는 이유는 제가 그 물건들을 계속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일을 하면서 필요한 것들을 꺼내고, 판단을 미룬 것들을 잠시 두고, 나중에 다시 볼 것들을 눈앞에 남깁니다.
책상은 물건을 보관하는 곳이 아니라, 판단을 미뤄둔 것들이 잠시 머무는 곳입니다.
바탕화면은 왜 정리하는가
그런데 제가 실시간으로 정리하는 작업 공간이 하나 있습니다.
컴퓨터 바탕화면입니다.
바탕화면은 한 번 어지러워지면 감당할 자신이 없습니다.
파일 하나, 캡처 이미지 하나, 다운로드한 자료 하나가 쌓이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무너집니다.
디지털 공간은 물리적 책상과 다르게 부피감이 없습니다.
쌓이는 느낌이 없다가 어느 순간 감당할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저는 바탕화면만큼은 거의 강박적으로 정리합니다.
묘한 일입니다. 물리적인 책상은 어질러두면서, 디지털 바탕화면은 정리합니다.
책상 위의 물건은 손으로 더듬을 수 있지만, 바탕화면의 파일은 한 번 잃어버리면 더듬어서 찾을 수 없습니다.
책상 위의 어지러움은 몸이 기억하지만, 바탕화면의 어지러움은 검색창이 기억합니다.
저는 아직 검색창보다 손을 더 믿는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사유와 방치 사이
책상 위에는 생각의 흔적도 남습니다.
전에 놓아둔 메모가 보이면 그때 하던 고민이 떠오르고, 읽다 만 자료가 눈에 들어오면 중단된 생각이 다시 이어집니다.
일하는 중에는 보기 좋은 질서보다 다시 이어갈 수 있는 단서가 더 중요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 선택이 쌓이면 책상은 어지러워집니다.
여기까지 말하면 꽤 그럴듯한 변명처럼 들립니다.
공간마다 질서의 기준이 다르고, 책상은 손을 위한 인터페이스이고, 물건은 생각의 흔적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결국 귀찮아서 안 치운 것도 맞습니다.
서재나 회사의 책상은 주로 저의 공간이고, 누군가 평가하는 공간이라기보다 제가 일하고 생각하고 버티는 공간입니다.
그러다 보니 조금 방만해집니다. 컵은 컵이고, 영수증은 영수증이고, 다 쓴 포스트잇은 다 쓴 포스트잇입니다.
그것까지 생각의 흔적이라고 하진 않겠습니다. 지나간 일의 껍데기에 가깝습니다.
그러니 제 책상에는 두 가지가 같이 있습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생각의 흔적과, 그냥 치우기 귀찮았던 흔적.
둘을 완전히 구분하기는 어렵습니다. 남겨둬야 할 것은 작업의 실마리이고, 치워야 할 것은 지나간 일의 껍데기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책상을 조금 정리해보려 합니다.
거창하게 다 뒤집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게 시작하면 또 대청소가 되고, 대청소가 되면 시작하기 싫어질 테니까요. 컵을 치우고, 영수증을 버리고, 이미 끝난 메모 몇 장만 정리하는 정도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마지막 변명
물론 이 이야기를 아내가 들으면 바로 반론할 겁니다.
사실 아내는 제가 거실 정리를 그렇게 잘하는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맞습니다. 그러니까 조금 더 정확히 말하겠습니다. 저는 정리를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정리하고 싶은 마음과 미루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매번 협상하는 사람에 가깝습니다. 거실에서는 그 협상이 비교적 빨리 끝나고, 책상에서는 자주 결렬됩니다.
책상 전체를 정리하는 일은 아직 무리입니다.
하지만 어제 마신 컵까지 사유의 과정이라고 우기지는 않기로 했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