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잡지가 많던 집
어린 시절 우리 집은 이른바 대가족이었습니다.
조부모님은 물론이고, 아직 미혼이었던 고모들도 셋이나 함께 살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머니는 대체 어떤 하루를 살았던 걸까 싶지만, 이 글에서 중요한 건 우리 집에 잡지가 많았다는 사실입니다.
<레이디경향>, <영레이디>, <하이틴> 같은 이름들이 기억납니다.
40년 전 흐릿한 기억 속의 저는 그 잡지들을 꽤 즐겁게 봤습니다.
지금 떠올려 보면 근거가 약하거나 시대착오적인 조언도 많았지만, 당시의 잡지들은 세상을 작은 규칙으로 번역해주는 이상한 매력이 있었습니다.
얼굴형에 맞는 앞머리. 종아리가 얇아 보이는 양말 길이. 첫인상을 좋게 만드는 색. 그리고 가로 스트라이프는 뚱뚱해 보이고, 세로 스트라이프는 날씬해 보인다는 패션의 상식 같은 문장들.
어쩌면 그 재미가 나중에 저를 매거진 에디터라는 일로 데려갔는지도 모릅니다.
옷 한 벌, 문장 하나, 사진 한 장이 사람의 인상을 어떻게 바꾸는지 보는 눈.
그걸 처음 배운 곳은 대단한 이론서가 아니라, 집 안 어딘가에 쌓여 있던 잡지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중에서도 오래 기억하는 문장이 있습니다.
가로줄무늬는 시선을 좌우로 움직이게 해서 몸을 넓어 보이게 하고, 세로줄무늬는 시선을 위아래로 움직이게 해서 몸을 길고 날씬해 보이게 한다.
문장만 보면 너무 그럴듯했습니다. ‘믿었다’ 수준이 아니라, ‘해는 동쪽에서 뜬다’는 정도의 상식처럼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상식을 안다는 게 저를 조금 우쭐하게 만들었습니다.
패션을 안다기보다, 패턴과 시선 사이에 숨은 규칙 하나를 훔쳐본 느낌에 가까웠습니다.
세로줄이 옷장에서 사라졌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어느 순간 제 옷장에는 세로줄이 거의 사라졌습니다.
줄무늬 옷은 여전히 있지만 대부분 가로줄입니다.
길에서 사람들의 옷차림을 봐도 그렇습니다.
세로 스트라이프 셔츠는 어딘가 유별나 보이고, 가로 스트라이프 티셔츠는 그냥 평범한 옷입니다.
상식대로라면, 외모와 체형에 꽤 엄격한 한국 사회를 살아온 우리에게 세로줄무늬 옷이 더 널리 선택됐어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더 날씬해 보이는 규칙이 분명했다면 말이죠.
상식은 그대로인 줄 알았는데, 거리와 옷장의 취향은 상식과 다른 쪽으로 가 있었습니다.
이쯤에서 갑자기 궁금해졌습니다.
가로줄은 정말 뚱뚱해 보일까. 세로줄은 정말 날씬해 보일까.
어릴 때 잡지에서 배워 선입견처럼 가지고 있던 그 말은, 과연 맞는 말이었을까.
상식과 정반대였던 착시
찾아보니 이 문제는 패션 상식이라기보다, 인지심리학에서 다루는 시지각의 문제에 가까웠습니다.
헬름홀츠 착시라고 불리는 현상이 있습니다.
같은 크기의 사각형 두 개를 놓고, 하나에는 가로줄을, 다른 하나에는 세로줄을 채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가로줄이 들어간 사각형을 더 높고 좁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반대로 세로줄이 들어간 쪽은 더 낮고 넓게 보일 수 있습니다.
사실 조금 머쓱했습니다.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하면서도, 이 오래된 패션 상식을 헬름홀츠 착시와 연결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너무 오래 상식으로 저장해둔 문장은, 오히려 의심의 대상이 되지 않았나 봅니다.
아니면, 혹시 제가 학부 때 공부를 안 했나 싶어 잠깐 기억을 더듬었는데… 답은 얻었지만 여기 쓰진 않겠습니다.
어쨌든, 제가 알고 있던 상식과 달랐습니다.
가로줄이 좌우로 시선을 끌어 몸을 넓어 보이게 한다는 설명은 직관적으로는 그럴듯합니다.
그런데 헬름홀츠 착시에서는 오히려 가로줄로 채워진 영역이 세로로 더 길어 보입니다.
물론 이게 가로줄을 입으면 무조건 날씬해 보인다는 말은 아닙니다.
사람의 몸은 사각형이 아니고, 옷은 평면이 아니니까요.
줄의 굵기와 간격, 색의 대비, 옷의 핏, 몸의 형태, 보는 사람이 어디에 주의를 두는지까지 함께 작동합니다.
얇고 촘촘한 줄인지 굵고 강한 줄인지, 몸에 붙는 니트인지 여유 있게 떨어지는 티셔츠인지에 따라 같은 가로줄도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그러니 패션잡지의 오래된 조언이 완전히 허무맹랑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로선이 특정 부위를 끊어 보이게 하거나, 세로로 떨어지는 재킷의 앞선과 팬츠의 센터프레스가 몸을 길어 보이게 하는 순간은 분명 있습니다. 우리가 스타일링에서 말하는 수직선의 효과는 어느 정도 일리가 있습니다.
한 줄로 압축된 법칙
문제는 그 모든 복잡한 조건이, ‘가로줄은 뚱뚱, 세로줄은 날씬’이라는 한 줄짜리 법칙으로 압축됐다는 데 있습니다.
실제로 이 통념은 그럴듯한 조언으로는 오래 살아남았지만, 검증의 자리에서는 잘 버티지 못했습니다.
2011년 한 연구는 헬름홀츠 착시를 패션에 적용해, 수평 줄무늬가 더 뚱뚱해 보이게 만든다는 통념을 흔드는 결과를 내놓았습니다.
즉, 헬름홀츠의 원래 관찰에 가까웠습니다.
이후 연구들도 이 문제를 단순한 줄무늬 방향의 법칙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말합니다.
줄무늬의 굵기, 간격, 색 대비, 체형까지 함께 봐야 한다는 거죠.
그러니까 결론은 생각보다 싱겁습니다.
가로줄이 무조건 뚱뚱해 보인다는 말은 틀렸습니다.
그런데 가로줄이 무조건 날씬해 보인다는 것도, 세로줄이 언제나 날씬하다는 것도 너무 가벼운 결론입니다.
옷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고, 사람의 눈도 그렇게 순진하지 않습니다.
내가 외운 건 진리가 아니라 문장이었다
제가 정말 다시 보게 된 것은 줄무늬가 아니라, 오래된 상식의 형태였습니다.
저는 그동안 패션의 진리를 알았던 게 아니라, 패션잡지의 한 문장을 오래 외우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 문장은 꽤 그럴듯했고, 기억하기 쉬웠고, 세상을 조금 이해한 듯한 느낌을 줬습니다.
그래서 오래 기억에 남았습니다.
잡지의 힘은 거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완전히 맞는 말을 해서가 아니라, 복잡한 세계를 외울 수 있는 한 줄로 정리해줬다는 것.
몸과 옷과 시선과 취향을, 기억하기 쉬운 법칙으로 바꿔줬다는 것.
지금 보면 그 시절의 생활 지식들은 허술합니다.
어떤 헤어스타일이 이성의 시선을 끄는지, 어떤 색이 행운을 부르는지, 어떤 옷이 성격을 다르게 보이게 하는지.
근거는 약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옷을 고르면서 자신의 성격을 상상했고, 머리 모양을 정하면서 운명을 떠올렸습니다.
근거는 약했지만, 세상을 해석하려는 열의는 있었습니다. 저는 아마 그 열의를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가로줄무늬는 정말 뚱뚱해 보일까
아마 대답은 이 정도일 겁니다.
'그럴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배웠던 것처럼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가로줄과 세로줄 사이에는 인지심리학도 있고, 스타일링 경험칙도 있고, 시대의 취향도 있고, 어린 시절 잡지를 넘기던 저의 작은 우쭐함도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가로줄무늬 옷을 입어도, 세상에 시각적 민폐를 끼친다는 생각은 덜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사람의 눈은 생각보다 복잡하고, 옷은 생각보다 자유롭고, 제가 오래 믿었던 상식은 진리보다는 낭만에 가까웠습니다.
끝.